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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in use

정확성과 유창성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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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좀 배우다 보면 누구나 빠지게 되는 딜레마 중 하나가 바로 '정확성(accuracy)'을 목표로 할 것이냐, '유창성(fluency)'에 집중할 것이냐 하는 문제다. 두 대립되는 문제가 언제나 그렇듯 어느 한쪽을 배타적으로 취하지는 않더라도, 어떤 안경을 끼고 보느냐에 따라 영어를 습득하고 배우는 속도나 성취도는 상당히 달라진다. 문제의 정답만 골라야 하는 학교에서는 정확성에 집중해 영어를 가르치겠지만, 다양한 영어가 말해지고 쓰이는 현 상황이나 의사소통이라는 언어의 본래 목적을 고려한다면 유창성이 먼저다. 공부와 습득을 정확히 둘로 나눌 수 없고 전자가 후자를 위한 과정으로 볼 수도 있지만,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지금에 와서는 좀더 깊은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1. 학교 영어 교육의 목표, 정확성 

실제로 잘 배우는 것보다 잘 평가받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어,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까가 학교 교육의 주목적이 되었다. 물론, 영어 능력을 수치로 나타내어 정확히 평가하는 것에 부정적인 측면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받은 점수를 기준으로 부족한 영어 능력을 개발하고, 다시 평가를 받아 얼마나 나아졌는지 확인하여, 다음 학습을 계획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평가의 중요한 기능이다. 그러나 현재 학교에서 치러지는 영어 시험에서 이런 형성적 평가(formative assessment)의 역할을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학교에서 영어는 완벽한 하나로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학교가 문법이라는 지식에 치중할 수 밖에 없는 아주 훌륭한 조건이기도 하다.  

 

2. English vs englishes

나도 오랫동안 그렇게 배웠고 아직도 영어를 소문자로 시작하거나 뒤에 복수형 어미를 붙이면 어색하다. 그러나 언어학적으로 보면 영어는 현재 영어권 국가에서 사용하는 언어라는 의미보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의사소통 수단이라는 역할이 더 강조된다. english as a lingua franca라는 세계 공용어로써의 영어라는 용어도 이런 현실을 잘 반영한 것이다. 또한,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필리핀, 홍콩 등과 같은 영어권 국가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영어도 각각 다르다. 물론, 의사소통이 어려운 정도는 아니지만 흔히 말하는 미국식 영어, 영국식 영어가 엄연히 존재하고 필리핀과 홍콩만 가더라도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영어와 다른 영어가 존재한다. 그래서 영어를 언어학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영어에 관사를 붙이고 복수형으로 쓰는 것이 그렇게 낯선 일은 아니다.

 

3. 정확성의 허상

정확성이라는 이상에만 매달릴 수 없는 또다른 이유는 원어민도 실제로 말을 하고 글을 쓰면서 많은 실수와 오류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실생활에서 우리가 뉴스에서 보는 아나운서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어순이 어색하다든지 부적절한 어휘를 사용한다든지,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은 틀린 것으로 알고 있을 만한 말들을 별 어려움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또 이해한다. 우리의 말을 듣는 사람은 말하는 내용에 관심이 있지, 얼마나 정확한 발음과 문법으로 그 내용을 전달하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영어권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도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조리 있게 전달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한국어가 아닌 영어에만 갖고 있는 정확성이라는 그 장벽이 우리가 영어를 더 배우기 어렵고 피하고 싶은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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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앞서 이야기했듯이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서 정확성이나 유창성 중 어느 하나만 배타적으로 발달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살펴봤을 때, 우리가 현재 어디에 집중하고 있는지 또 영어를 언어로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공부를 목적으로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는 우리가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문화적이고 교육적이고 환경적인 영향으로 단 하나의 영어에 집착하는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영어를 잘 못하는 민족이 될 수도 있다. 실수 좀 하면 어때? 내 말도 아닌데. 말만 통하면 됐지. 이런 배짱과 용기가 없으면 영어는 영원히 당신 입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